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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지식

518 민주화 운동, 배경과 과정에 대해 정리

by HRD교육멘토 2021.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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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 민주주의와 관련된 역사는 상당히 많지만, 그중

아직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배경과 과정을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20대 중후반까지도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10대 및 20대 초 분들은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과거는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교과서입니다. 다시 518 민주화 운동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잘 알아두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광주에-들어선-계엄군
광주에-들어선-계엄군


518 민주화 운동 배경

 

518 민주화 운동의 배경의 시작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암살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당시 중앙 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암살 시도를 했고, 12월 12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전두환이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체포하면서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이때, 민주 정권 수립을 요구하던 시민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후 전두환은 전국적인 민주화 여론을

없앴고, 군부의 정치 참여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여론 조성을 했습니다.

 

이후 지속적으로 전두환은 국회해산 비상계엄 확대 등, 신군부 세력이 나라를 지배할 수 있는 

수단들을 지속적으로 실행하려고 했습니다.

 

이때, 여러 정치인들은 민주화를 위해 비상계엄 해지 등 개헌안을 접수하였고,

일부 시민 및 학생들은 서울역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5월 15일 서울역 시위에서 한 청년이 버스를 탈취, 저지선을 지나 전경에 돌진하였고,

이로 인해서 이성재 일경이 사망, 그리고 4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렇게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가 내려집니다.

 

국회를 무력으로 해산하고 민주화에 노력하던 정치인 학생 교수 등을 체보해 갔습니다.

비상계엄으로 전반적인 생활을 신군부의 감시하에 하게 되었고, 휴교, 정치활동 정지 등을 강요받았습니다.

 

이에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5월 18일 학교 앞에서 오늘 저희가 알아보려는 518 민주화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서 신군부는 전남대학교 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하면서 무력진압을 실시했고, 무차별 구타하였습니다.

이에 전남대학교 학생은 물론 광주 시민들은 모두 분노하였고, 518 민주화 운동이 광주 전체로 번지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진군하는-계엄군사망자를-추모하는-시민게엄군에게-잡힌-시민
518 민주화 운동

 

518 민주화 운동 과정

 

  • 광주 시민들의 참여 그리고 언론통제

 

학생들 뿐 아닌 일반 시민들까지 전체적으로 5월 19일부터 518 민주화 운동 참여가 이루어졌고,

이에 신군부 계엄군은 더욱 잔인하게 진압을 시작했습니다. 구타는 물론 총기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때리고

대검 사용 등 상당히 비인간적인 진압을 시작하였습니다.

 

더불어 언론의 통제까지 이어졌습니다.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보셨듯 광주를 제외 다른 곳에 언론에서

518 민주화 운동을 시민들의 불법 폭동으로 보도하기도 했고, 실상은 전혀 알려지지 못하도록

강압적으로 언론과 교통 통제등을 하였습니다.

 

더불어 실탄 배분은 금지하였지만, 11 공수여단이 명령을 무시, 실탄을 분배하였습니다.

 

  • 계엄군 실탄 발포 및 학살

5월 21일 전남도청 그리고 전남대학교 앞에서 계엄군과 시위대는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협상은 당연하게도 결렬되었고, 전남도지사는 공수부대를 철수시키겠다 발표하였지만, 

계엄군은 철수하지 않았습니다. 조금씩 계엄군에게 불리한 입장이 되어가자 

 

계엄군은 하면 안 될 짓을 하게 됩니다.

 

전남도청 집단 발포를 하였고, 전일 빌딩, 수협, 광주관광호텔 등에 4인 1조로 조준사격을

가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정말 많은 사망자 및 부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 시민군의 무장

구타, 폭력이었던 계엄군의 진압은 실탄 발포까지 해버렸고, 시민들은 더 이상 맨몸으로

시위에 참가할 수 없었습니다. 시민들도 경찰서 파출소에서 무기를 구했고 통제된 광주를

몇 명의 사람들이 차를 타고 탈주하여 전국에 사실을 알리고 무기를 구해 분배하였습니다.

 

  • 광주 시민군의 반격

계엄군은 광주시 외각 도로망 차단을 지시받고, 광주도청을 다시 탈환하였습니다.

하지만 외각을 정말 차단하고 있던 계엄군은 완벽하게 광주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계엄군이 외각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실탄 발포는 당연했고, 사망자도 많이 나왔습니다.

 

  • 광주 재진 압

외각으로 물러나 있던 계엄군은 다시 광주 재진 압을 위해서 5월 27일 군인 2만 5천 명을

투입 전라남도 도청에 1만여 발의 탄을 발사하며 시민군을 살상하였습니다.

 

이후 남은 시민군들 모두 체포 연행하였습니다.

 


518 민주화 운동을 정리하며

 

글이 길어질 것 같아서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짧게 요약하면서 했습니다.

중간중간 더 많은 사실들이 있습니다. 관심 있게 찾아보시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518 민주화 운동 전개과정 마무리가 찝찝하실 겁니다. 이후 광주는 진압되었고 전두환은

민주화 인척, 투표권을 자신의 사람들에게만 주고 대통령이 됩니다. 이후 독재정치를 시작하죠

 

518 민주화 운동이 단순하게 광주에서 일어난 가슴아픈일만이 아닌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사건입니다.

이후 여러 민주화 운동에 영향을 주고, 군사정권에 대한 반발감을 안기며 입지가 줄어들었죠.

또한, 외신에서는 다른 국가의 민주화운동에도 518 민주화 운동이 영향을 끼쳤다는 평도 많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518 민주화 운동의 사상자 기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518 민주화 운동에서 공식 확인이 된 사망자는 165명 부상 후 사망은 113명 행방불명은 84 명입니다.

공석적인 수치이지만 알려지지 않은 밝혀지지 못한 비공식 사상자는 더욱 많을 것으로 모두 예상합니다.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 배경과 과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잊지 않고, 지금 민주주의에서 편하게 행동하고 말할 수 있도록 희생된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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